보문사의 나한 [동화원고]
보문사의 나한
그 해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며칠 동안 눈이 쉬지 않고 내리니 세상은 온통 새하얀 세계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눈이 지붕보다 높이 쌓였씁니다.
그러자 길이 모두 없어져서 사람들은 다닐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겨우 이웃집이나 뒷간, 우물에 가는 길 정도만 눈 속에 굴을 뚫어 다닐 뿐입니다.
이런 가운데 동지날을 맞이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동지날 팥죽을 끓여서 집 둘레에 뿌려 나쁜 귀신을 물리치고 집안에 행운이 깃들기를 비는 풍속이 전해 오고 있습니다.
절에서도 동지는 큰 명절이므로 팥죽을 끓여 부처님께 공양을 바치는 행사가 있습니다.
보문사에서도 부처님께 팥죽 공양을 드리기 위해 팥죽을 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야단입니다.
지난 밤 추위에 스님들이 서로 미루다가 불씨를 잘 묻지 않아서 불이 꺼져 버렸습니다.
옛날에는 성냥이 없었으므로 불씨를 잘 묻어 두어야 했습니다.
아침밥 먹은 후엔 불씨를 재 속에 잘 보관했다가 그걸로 점심을 해 먹고 점심때의 불씨를 저녁까지, 다시 이튿날까지 살려 나가는 일이 집안의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만약 불씨가 꺼지면 이웃집에서 빌어 와야 하는데, 불씨를 빌려 주면 그 집의 재산이 새나가고 자손에게 좋지 못하다고 믿고 있어서 여간해서 불씨를 잘 빌려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씨는 불을 붙인 후엔 받드시 돌려 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불씨를 꺼뜨렸으니 보통 이이 아닙니다.
더구나 저 멀리 산 아래 마을까지 불씨를 얻으러 가야 하는데, 오늘같이 눈이 사람의 키를 훨씬 넘게 쌓인 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스님들은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고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좋은 수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으니 눈이 녹는 날까지 굶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아침 일찍 팥죽을 끓여서 먹었습니다.
이때 이 마을 고씨네 집에 나이 어린 동자승이 나타났습니다.
"실례하겠습니다. 안에 누구 계십니까?"
고씨가 문을 열어 보니 어린 동자승이 문 밖에서 있습니다.
"저런! 이 눈 속에 어린 스님이 어떻게 오셨을까? 날씨가 추우니 우선 방으로 들어오십시오."
"고맙습니다. 저는 보문사에 있사온데 곧 돌아가야 합니다. 절에서 스님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다린다니, 무얼 기다립니까?"
"예, 간밤에 추위에 불씨가 꺼져 주지 스님께서 저더러 불씨를 빌어 오라 해서 왔습니다."
"동자 스님한테 불씨를 빌어 오라 했단 말인가요? 그럴 수가, 내가 알기로는 보문사에 스님이 열 분이 넘게 있는 줄 아는데, 하필 이 추위에 제일 나이 어린 동자 스님을 보내다니....아뭏든 불씨는 빌려 드릴 테니 어쨋든 들어와서 팥죽이나 한 그릇 들고 가십시오."
준다던 불씨는 안 주고 팥죽을 먹으라 하니 동자승은 마지못해 들어가 팥죽을 한 그릇 먹었습니다.
그리고 불씨를 얻어 가지고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왔습니다.
보문사에서는 스님들이 아직도 궁리만 하고있습니다.
이때 갑자기 부엌에서 불 붙는 소리가 났습니다.
나가 보니 아궁이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스님들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더 알아보지도 않고 팥죽을 끓여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음 맛있게 나누어 먹었습니다.
춥던 겨울도 봄의 입김에 녹아 쌓였던 눈도 어느덧 다 녹았습니다.
눈이 녹으니 길도 풀리고 사람들의 왕래도 잦아졌습니다.
어느날 주지 스님이 마을에 내려갔다가 우연히 고씨를 만났습니다.
고씨는 지난 겨울 일이 생각나서 주지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스님, 지난 겨울 제 집에서 빌어간 불씨를 안 돌려 주십니까?"
"예? 불씨를 돌려 달라구요?"
"네. 지난 겨울 동지때 주지스님이 동자스님을 시켜 불씨를 빌어 가신 일이 있지 않습니까?"
"저의 절에서 지난 동지날 불씨가 꺼진 일은 있습니다만 불씨를 빌어왔단 말은 못들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절에는 동자승이 없습니다."
"분명히 동자스님이 와서 주지스님의 심부름이라며 불씨를 가져갔습니다. 동자스님이 팥죽도 한그릇먹고 갔는걸요."
"팥죽을 얻어 먹고 불씨를 가져왔다 그말씀이시군요. 허허! 그것 참 이상도 하다."
주지 슨미은 어찌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보문사에는 있지도 않은 동자승이 왔었다니 더욱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주지스님은 절에 돌아와 여러 스님에게 이 말을 하고 불씨를 빌어 온 일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이 없습니다.
그때 주지스님은 짚이는게 있어 문을 열고 나한전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맨 끝에 앉아 있는 어린 나한상의 입에 팥죽이 묻어 있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스님들은 무슨일이든 서로 미루지 않고 자진해서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한의 영검에 믿음이 더욱 강하게 일어나 이전보다 더 열심히 도를 닦았다고 합니다.
-끝-